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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잠히 하나님 앞에 있기만 하라 – 뉴스앤조이

잠잠히 하나님 앞에 있기만 하라 – 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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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중추적 역할은 예배에 있다. 그런데 이 예배를 위해 부수적으로 들어가는 자원은 한둘이 아니다. 음향과 영상보조, 자리 안내와 찬양대 봉사 등 상당수가 인력이 필요한 일이다.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어려운 일 투성이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예배가 소홀히 취급될 수 있다는 데 있다.

마르다가 생각하기에 예수님은 너무나도 귀한 손님이었다. 그런 손님을 맞기 위해 마르다는 아마도 종일 집안 구석구석을 치웠을 테고, 음식 준비에 눈코 뜰 새 없었을 것이다. 마르다는 전심으로 예수님을 섬기려고 했다. 하지만 마르다는 결정적인 부분, 곧 예수님의 혼과 육 너머를 보지 못했다. 분주히 몸을 놀리는 마르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마리아가 좋은 편을 택했다.”

오늘날도 이와 같은 예를 찾기가 어렵지 않다는 점에서 성경에 등장하는 마르다는 인칭 대명사라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우리의 성정은 아무 일 않고 잠자코 있는 걸 낭비로 보는 경향이 있다. ‘시간이나 재물 따위를 헛되이 헤프게 씀’을 이르는 낭비의 사전적 의미로도 낭비는 줄이거나 아예 없애야 할 것일 뿐 고쳐 쓸 어떤 것이 아니다. 그 용어 앞에는 다른 수식어가 붙지 않는다. 예를 들어 ‘고상한 낭비’ 같은 은유가 성립할 여지가 없다.

저자는 ‘어떤 경우’의 낭비 앞에 대담하게 수식어를 붙임으로써 낭비의 개념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같은 낭비라도 가치 있는 낭비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머물러라>(규장)는 그리스도인이 새겨야 할 고갱이에 초점을 맞춘다. 분주한 일상과 그 안에서 흔들리는 신앙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재튜닝하는 데 유익한 이정표들이 눈길을 끈다.

책은 각 장의 구성을 따라 여러 갈래의 소주제로 흩어져 있다. 그 각각의 소주제는 핵심 주제가 지향하는 지점에 또렷하게 꽂힌다. 오남용된 종교 생활에 묵직하게 경종을 울리는 한편 신앙의 기본 원리에 구심하는 영성이 빛난다. 이 책의 특징적인 부분이다.

사랑에도 다 때가 있다. 속으로 좋아만 하고 있으면 사랑이 진전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불쑥 나서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적절한 때가 오기를 기다리되 기회가 오면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속마음을 쏟아 놓아야 비로소 진정성 있는 관계로 발전하는 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 앉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멀찍이 서서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생각만해서는 돈독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 곁에 가까이 붙어 앉는 시간, 그 시간은 자주 가질수록 좋지만 특히 첫 만남에서 그 부분에 진전이 있다면 사랑은 급속도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다음 기회로 미루게 되면 언제 그 기회가 찾아올지 기약하기 어렵다. 관계가 ‘지금 여기(now-here)’의 문제로 소환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한창 바쁜 마르다 편에선 예수님의 무릎 맡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주시하는 마리아의 행동이 일손 낭비로 비쳤을 것이다. 굳이 지금이 아니어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있을 거라는 나름의 판단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마르다가 생각하듯 다음 기회는 보장이 없다.

마리아는 예상 가능한 주변의 눈치와 언니의 볼멘소리를 감내하며 그 자리에 앉았을 것이다. ‘굳이 지금이 아니어도’ 라는 보편적인 관념이나 ‘바쁜 현실에 비춰 낭비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자의식을 애써 물리치지 않고서는 그 자리에 앉을 수 없다. 저자가 ‘그분 앞에 잠잠히 있기만 하는 것’을 거룩한 낭비로 본 이유의 일단을 마리아가 잘 드러내고 있다. 초점을 어느 곳에 맞추느냐의 문제에 있어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마리아였던 것이다.
“지금처럼 바쁘게 살아가는 세상에서 하나님 앞에 머무르는 시간은 참으로 낭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거룩한 낭비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삶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낭비 같던 시간이 사실은 가장 빛나는 시간이었다는 저자의 고백에서 ‘거룩한 낭비’는 자칫 여러 가지 일에 휘둘릴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이정표 하나를 제시한다. 실제 그리스도인이 앙망하는 충만한 삶이나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거룩한 낭비’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그것이 자주 잊히거나 더디게 실행되는 아이러니한 현실은 그 이유의 근원을 곱씹어 생각하게 한다.

속이는 영, 미혹의 영인 사탄은 그리스도인을 누가 봐도 또렷이 구별되는 양자택일의 상황으로 미혹하지 않는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예에서 보듯이 예수님을 섬겨야하는 상황적 요인에서 섬김의 종류를 두고 우선순위를 다투는 마음에 사탄은 깃든다. 그런 사탄에게 틈을 주지 않으려면 무엇이 ‘좋은 선택’인지를 앞서 알아야 한다. 그 선택지가 바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시작을 알리는 ‘잠잠히 그분 앞에 있기만 하는 것’임에야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스도인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중에 두드러진 사실 하나가 ‘우리가 말하고 하나님은 듣는’ 직선적인 관계 설정이지 않은가. 다수의 그리스도인이 마치 미뤄둔 일을 처치하기라도 하듯 작정했던 말들을 쏟아 놓고 뒤도 안 돌아보고 거기서 빠져나온다. 하물며 친구와 어떤 문제를 상의할 때도 친구의 다음 말을 들으려고 하는데, 무슨 영문에선지 하나님의 대답을 듣지 않는 행태가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슬픈 현실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듣고 아는 분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만 말할 권리가 있는 듯 행동한다. 하나님도 말씀하실 자격이 있다! 듣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분의 마음을 알 수 있는지 난감하다. 그 과정 없이 그분이 부어 주실 성령 충만을 또 어디서 기대한단 말인지 참으로 어리석다. 저자가 언급한 ‘새로운 차원의 삶’이라는 활자 밖으로 드러난 행간의 의미가 그런 것이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성령으로 충만해야 했다. 그 예수님께서 우리 또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전에 오직 한 분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가 권능을 받아야 한다고 덧붙여 말씀하셨다. 우리가 오늘날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선행조건으로 성령 충만은 바라면서 정작 그 단초가 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소홀하다면 그것이야말로 비성경적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싶어 하는 건 그리스도인의 재창조된 성정이다. 그러기 위해 잠잠히 하나님 앞에 이르자! 거기서 그분에게 비롯한 생수의 강을 맛보자!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 도다. (시편 62:5)”

김정완 / <크리스찬북뉴스> 부운영자, 네이버 파워블로거, 평신도사역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