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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철 장로의 치유 사역과 신학에 관하여-현요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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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철 장로의 치유 사역과 신학에 관하여현요한 교수(기독교학술원 수석 연구원, 장신대) 소논문

기독교포털뉴스 | unique44@naver.com

승인 2014.04.16  11:42:06
기독교포털뉴스 카카오톡 아이디: kportalnews2012년 4월 6일 제 21회 기독교학술원(원장 김영한 교수)의 월례 기도회에서 현요한 교수(장신대)가 ‘기독교영성과 치유은사 – 손기철 장로의 경우’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소논문입니다. 치유사역을 하며 활동중인 손기철 장로에 대해 조금더 다양한 접근을 하고자 학술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특히 최근에 게재한 이인규 대표(평신도이단대책협회)의 글, <손기철 장로의 저서에 나타난 문제점>과 함께 보시면 더욱 도움이 되실 겁니다.[편집자주]

이 글은 요즈음 한국 기독교계에서 상당한 영향을 미치며 치유 사역을 하고 있는 손기철 장로의 치유 사역과 신학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점검해 보려는 의도에서 집필되었다. 그에 대하여는 교계 지도자들 중에서 추천과 지지를 보내는 분들도 있고, 격렬한 비판을 하는 분들도 있어서 그에 대한 판단에 상당한 혼선이 있다. 이 글에서는 그의 저서들과 그의 집회 실황 영상들을 근거로 그의 신학과 사역의 내용들을 정리해 보고 가능한 한 공정한 입장에서 그의 신학과 사역의 긍정적인 점과 문제점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그가 저작한 책들이 여럿 있지만, 이 글에서는 주로 그의 신학적 입장이 잘 드러나는 세 권의 책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 『고맙습니다 성령님』, 『왕의 기도』를 중심으로 다룰 것이다.
손기철 장로가 치유사역자가 되기까지의 내력은 그의 저서 여러 곳에 간간히 나타나지만, 『고맙습니다 성령님』 이라는 책에서 비교적 소상하게 간증하고 있다.1) 간단히 살펴보면 그는 건국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나와서 미국 메릴랜드 대학과 조지아 대학에서 공부했다. 조지아 대학 시절에 그곳 한인교회에서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으며, 거기서 성령 체험을 하고 방언도 하였다고 한다. 그 후 그는 박사학위를 마치고 모교에 돌아와 가르치면서 온누리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거기서 창조과학회를 알게 되어 열심히 활동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999년에 교회의 임명으로 온누리교회 내적치유사역팀에 들어가 봉사하다가 그만 자기가 내적으로 치유를 받고 성령의 은혜를 회복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해 9월에 지도 목사의 명으로 자신이 안수하며 치유기도를 시작하며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2004년에 온누리교회 담임목사의 허락을 받아 교회 안에서 월요치유집회를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큰 반응이 없었으나 차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는 치유 사역과 교수직으로 힘든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자신이 정말 치유사역자로 부름을 받았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2005년에 안식년을 내어 미국에 가서 여러 은사 집회와 치유 집회를 다니던 중 자기를 알지 못하던 어떤 치유 사역자로부터 부르심을 확인 받고 돌아와 다시 치유집회를 계속하게 되었다고 한다. 2008년에는 온누리교회를 떠나 독립하여 선한목자교회에서 장소를 빌려 월요치유집회를 계속하고 있다.2) 현재 그가 이끄는 헤븐리터치 미니스트리 (Hevenly Touch Ministry)는 독립교회선교단체협의회 소속으로 되어 있다. 또한 그는 전국 각지와 해외에도 돌아다니며 치유 집회를 인도하고 있다.

1. 그의 신학은 성령론 중심적이며, 은사주의적이다.
그의 저서들은 대부분 성령론을 다루고 있고, 성령의 은사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의 저서들의 목록을 보면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 (2006), 『고맙습니다 성령님』 (2007), 『왕의 기도』 (2008), 『기름부으심』 (2008), 『치유 기도』 (2009),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 (2009), 『기대합니다 성령님』 (2011). 이러한 그의 경향은 그가 속한 온누리교회가 성령과 은사를 강조하는 흐름을 도입한 것을 기본 배경으로 하고 있고, 또한 그가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내면서 아마도 오순절 운동, 은사주의 운동이나 제3의 물결 운동 등에 속하는 은사 집회와 치유 집회를 찾아다니며 영향을 받은 것과, 그가 그런 계통의 서적들을 통해 영향을 받은 것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얼마간의 신학 서적과 경건 서적, 특별히 치유 사역과 관련된 서적들을 통해 영향을 받았음이 그의 저서에서 인용하고 있는 이름들과 내용들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그는 또한 한 사람의 지성인이요 대학 교수로서 나름대로의 창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다소 비전문적이기는 하지만) 성경을 연구하면서, 자신이 경험한 내용들과 함께 나름대로의 사상과 사역 방식을 이루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그의 저서들과 설교에는 그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영향과 함께 그 나름대로의 창의적인 생각들이 드러난다.3)
그는 성령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분이요 하나님이시라고 한다. 그리고 분명하게 성령의 인격성을 강조한다. “성령님을 인격이 아닌 어떤 알 수 없는 기묘한 능력이나 에너지로 취급한다든지, 하나님을 돕는 분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4) 성령은 성부 성자와 함께 세계 창조에 협력하셨으며, 진리의 영이시고, 보혜사이시며, 전능하신 분이고, 사랑이시라고도 한다.5)

그는 성령의 내주, 그리고 구원(칭의 혹은 중생)과 구별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성령의 기름부으심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교리적 체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삼 단계 교리처럼 보인다. 성령님의 내주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입술로 고백할 때 성령님이 우리 속에 거하심을 말한다. 그러나 성령님이 내주하신다고 해서 온전히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6) 그는 온 우주에 편재하신 성령님(with us)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 안에 거하신다 (in us). 또한 우리가 우리 자신을 포기하고 우리의 삶을 그분에게 양도할 때 그분은 우리 안에 단순한 내주가 아니라 충만히 거하신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 즉 기름부으심은 ‘함께 거하심(with us)’과 ‘안에 거하심(in us)’과는 다르며, ‘위로부터 임하심(upon us)’에 달려 있다고 한다.7)

그에 의하면, 구원은 믿지 않는 죄인에 대한 것이지만, 성령세례는 성도에게 주어지는 것이라 한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성령세례는 구원 뒤에 주어질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 구원과 동시에 혹은 먼저 받을 수도 있다고 한다. 성령세례는 성령충만의 상태에 들어가는 시작, 출발점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고 한다.8) 성령세례는 하나님 영광의 임재, 안식, 내적 열매를 맺게 하는 것과 관련된다. 그는 성령세례가 옵션이 아니라, 말씀을 깨닫고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9)

성령세례는 특별한 사람만이 수행을 열심히 한 결과로 받는 것이 절대 아니라고 한다. 또한 특별한 곳에서 울부짖고 악을 써야만 받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한다. 성령세례를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로 더욱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세례를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10) 그러나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성령충만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성령세례는 성령님이 강력하게 임함으로 우리의 인격과 행동을 일시적으로 지배하심을 뜻하는 반면, 성령충만은 성령세례의 결과로 생긴 은사와 열매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삶을 말한다고 한다.11) 어떤 사람이 성령세례를 받아 성령님에 의해 온전히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 때,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와 열매들이 자연스럽게 나타난다고 한다. 은사는 외적인 능력으로 열매는 내적인 인격의 성숙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12)

성령세례를 받으면 성령이 충만해지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하나님의 기름부으심과 구분한다. 하나님의 임재는 그분의 영광, 그분의 인격을 가리키는 반면에, 기름부으심은 그분의 능력이라는 것이다.13) 영광의 임재 가운데 안식하는 것은 성령이 우리의 혼과 육을 다스리는 것이요 (성령의 내적 열매), 기름부으심은 우리의 혼과 육을 통해 이 땅에 실체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한다 (성령의 외적 열매인 은사).14) 기름부으심은 사역을 위한 것이요, 은사 즉, 외적인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기름부으심은 다른 사람들에게 많이 흘려보낼수록 더 큰 기름부으심이 임한다고 하며, 또한 하나님과의 친밀함과 비례한다고 말하기도 한다.15)

손 장로는 오순절 교파와는 달리, 방언이 성령세례의 표적으로서 반드시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16) 그러나 방언을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방언의 유익을 강조한다.17)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방언이 성령세례의 판단 기준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성령세례를 체험한 사람은 누구나 다 잠재적으로 방언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18) 그는 그러나 방언보다 중요한 것은 ‘삶의 변화’라고 강조한다.19) 이런 모습들은 성령세례를 중생과 구분하며 방언이 반드시 표적으로 따라온다고 보는 소위 고전적 오순절 교파의 견해와는 다르다. 또한 1960년대 이후 오순절 운동이 기성 교회들 안으로 흘러들어간 소위 신오순절운동의 경향과도 좀 다르다. 또한 1980년대에 이르러 오순절 운동에 비판적이던 일부 복음주의자들이 성령세례 교리에 집착하지 않고, 성령의 은사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한 소위 제3의 물결 운동의 주장과도 동일하지는 않다. 이는 배본철 교수가 제시한 성령세례에 관한 여섯 가지 이해 유형들 중 어느 것과도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 것 같다.20) 성령세례의 교리는 교파나 신학자들간에 견해가 다양하므로 여기서 그의 성령세례론이 옳은지에 대하여는 논하지 않기로 한다.

2. 그의 신학은 치유 사역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그는 오늘날에는 사도 시대 이후에는 은사나 기적이 종료되었다고 생각하는 신학적 제한에 반대하면서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치유하시며, 모든 사람을 치유하시기 원하신다고 주장한다.21) 그는 치유가 예수님의 대속에 있다고 본다. 그는 특히 이사야 53:5과 마태복음 8:16-17에 근거하여 예수님께서 우리 질병을 짊어지셨음을 강조한다.22) 물론 치유가 영혼의 구원과 같은 정도로 보지는 않지만, 치유가 믿는 자의 특권이라고 본다. 그러나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23) 그는 공생애 당시 예수님이 주님을 찾아 온 모든 병자들을 다 치유해 주셨다는 것을 강조한다(마 8:16, 마 12:15, 눅 6:19). 그는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사람에 따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녀인 우리 모두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고 싶어 하시며, 따라서 “우리를 치유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치유 받지 못하는 사람은 의심과 불신앙으로 예수님 앞으로 오지 않는 사람들뿐이라고 한다.24)

그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하는 주기도문의 구절을 매우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인다. 그의 하나님 나라 신학에 대하여는 다시 살펴보겠지만, 그에게 있어서 모든 사람의 치유는 하나님의 뜻으로 간주된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임했는데, 하나님 나라에는 질병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치유는 당연한 질서일 뿐입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에는 질병이 없습니다.”25) 그러나 정말 모든 사람의 질병은 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이미 해결되었으며,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치유를 원하시므로, 이제 우리는 단지 치유를 믿고 나가기만 하면 모든 질병은 치유되는 것인가? 이 땅에 도래한 하나님 나라는 모든 사람의 모든 질병을 모든 시점에서 다 보장하는 것인가? 그 자신도 자신의 집회에서 많은 사람의 병이 낫지 않은 채로 돌아간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26) 그래서 그 자신도 “하나님, 왜입니까?”라고 기도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질문이 자신이 교만해지지 않으며, 하나님의 깊은 비밀을 날마다 더 알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말하기도 한다.27)

여기에 얼마간 혼동스러움이 있다. 그는 하나님이 모든 질병을 고치시기 원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고, 질병이 생긴 데에는 어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런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흔히 인용되는 사도바울의 육체의 가시(고후 12:7-9)에 관한 이야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바울은 치유를 위해서 세 번이나 기도했으며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특별한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치유가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치유가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병이 낫기 위해서 병원에는 가지 않느냐고 반문한다.28) 물론 그도 성경에서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으로 해결되지 않은 경우들이 있음을 인정한다. 디모데에게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한 예라든지(딤전 5:23), 드로비모가 병이 들어서 병든 채로 밀레도에 남겨 두었다든지(딤후 4:20) 하는 경우이다.29) 그는 “하나님께서 모든 병든 자를 치유하시기 원하신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모든 병자들이 치유를 받는 것은 아니다”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신비에 속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에 대한 판단의 근원은 우리의 이성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달린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30)

결국 그는 참된 믿음으로 진실하게 기도해도 고쳐 주시지 않는 질병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일부 예외적인 일로 생각하며, 치유 여부의 문제는 신비에 속한다고 한다. 그런데 실상이 정말 그러한가? 그의 치유 집회에 참석하는 거의 모든 사람이 치유를 받고 극히 일부만이 예외적으로 치유를 받지 못하는가? 아니면, 반대로 치유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의 태반이 치유를 받지 못하지만 그래도 일부는 치유를 받는가? 아마 현실은 후자 쪽에 가까울 것이다. 성경 본문은 디모데나 드로비모의 경우가 무슨 대단히 신비스러운 예외처럼 말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손 장로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치유 사역자 존 윔버(John Wimber)에 의하면, 자기가 기도해 준 사람들 중에 정말로 완치된 사람은 25% 정도에 불과함을 인정하였다고 한다. 그것도 신경성 질병이거나 소화기계통의 병들이 많았다고 한다.31) 손 장로의 경우도 면밀히 조사해보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32)

3. 그의 치유 신학은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핵심 개념으로 한다.
그의 치유 신학의 기초가 되는 것 중에 하나는 바로 하나님 나라 신학이다. 이는 예수님이 선포하신 내용에 근거한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막1:15)”는 것이다. 신약성경에 하나님 나라 혹은 천국에 대한 말이 120회나 나올 만큼 이것은 중요한 주제이다. 하나님 나라는 공생애 중 예수님의 설교의 핵심 주제요, 부활하신 주님께서 40일간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 마지막 순간에 가르치신 내용이며 (행1:3), 제자들이 초대교회 때 전한 복음의 내용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그들도 복음의 말씀과 함께 따르는 표적으로 그 복음의 말씀을 확증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면서 치유를 비롯한 표적으로 그것을 증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임한다는 것이요, 왕의 주권이 이 땅에 나타남을 의미한다고 한다는 것이다.33) 그는 이것을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간 것에 비유한다. 전통적인 교회에서 가나안에 들어감을 성도의 안식에 비유한 반면, 손 장로는 가나안을 성도들의 영적 전쟁의 장소로 본다. 구원 받고 성령의 은혜를 받은 성도들은 이제 이 세상인 가나안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의 통로가 되어 정복하고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34)

그런데 그는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죽은 후에 영혼이 찾아가는 저 세상적인 실체로 보거나, 먼 미래에 주님의 재림에 의해서 비로소 실현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이 하늘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 심령에도 찾아오시며 그분이 계신 곳이 바로 그분의 나라라고 한다. 그는 하나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 “이미” 성취된 것이요, 저 하늘이 아니라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현실이라고 하는 점을 매우 강조한다. 그는 마태복음 12:28과 누가복음 11:20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선포하셨음을 강조한다.35) “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의 나라는 차원을 달리하지만, 서로 별개의 나라가 아니라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36)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통치의 개념”이라고 강조한다.37)그는 하나님 나라를 왕의 통치, 주권, 다스림 대신에 장소, 국가, 영토라고 보는 것은 기독교를 내세화하고 윤리화하는 잘못된 개념이라고 한다.38)

이는 일반 신자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신학계에서는 이미 많이 알려진 해석이다. 그것 자체는 그리 이상할 것이 없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저 세상적인 것으로만 생각해 왔던 일반 신자들에게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통치를 미리 맛보며 살 수 있음을 깨우쳐 준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려는 정신을 “킹덤 멘털리티(kingdom mentality)”라고 부른다.39) 이것은 “이 땅에서 하늘을 쳐다보는 관점이 아니라 (죄인이 의인이 되려고 애쓰는) 하나님 나라에서 이 땅을 내려다보는 관점 (의인이 주의 뜻을 이루려는 관점)”이라고 한다.40) 그는 “미래가 아니라 현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충돌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41) 이것은 영적 전쟁이요 이 전쟁에는 휴전이 없다고도 한다.42)

그런데 손 장로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승리하기 원하면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도록 해야 한다”고 한다.43)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면 하나님 나라가 된다고 한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초청하고, 내 자신부터 하나님 나라가 되어야 하며, 성령충만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그 다음 자신이 밟은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선포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시키면 그 때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것이다.44) 더 나아가 그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입술의 선포로 이 땅에 이루어진다”고 한다.45) 먼저 이렇게 하나님 나라가 도래해야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우리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땅에서부터 벌써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과,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여 그 나라를 입으로 선포해야 한다는 말은 옳은 말이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입술로 선포하면 비로소 임하는 것일까? 그가 말하는 왕의 기도의 방식으로 선포하면 그 순간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는가? 아니,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지는 않지만,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강림으로 이미 도래하여 있는 것 아닌가?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이 나라가 믿어지지 않고 보이지 않고 경험될 수 없지만, 믿는 자는 이미 그 나라의 백성이다. 비록 그가 어떤 질병에 걸렸더라도 그는 그 나라의 백성이다. 그의 질병이 낫지 않았을지라도 그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진실하게 살고 있다면 그에게 하나님 나라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의 입술의 선포로 비로소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가, 아니면 우리는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입술의 선포로 드러내고 전파하는 것인가?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강조하는 손 장로의 하나님 나라 신학은 일종의 실현된 종말론으로 볼 수 있다. 실현된 종말론의 입장에 서면, 대체로 종말의 미래적 차원에 대한 강조는 약해지기 마련이다. 그의 저서나 설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의 은혜를 통한 대속과 구원, 자기를 부정하고 포기하며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성화의 삶, 성령세례의 필요성, 그리스도의 대속에 포함된 치유의 은혜 등에 대한 강조를 볼 수 있다. 성령세례와 치유에 대한 그의 신학적 사상이 오순절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흥미롭게도 그가 강조하는 중요한 교리들 중에 오순절 교파의 중요 교리인 “임박한 재림”에 대한 것은 빠져 있다.46) 손 장로의 글들을 보면 구원, 성령세례, 신유, 하나님 나라 등에 대한 강조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오순절 교파처럼 임박한 재림을 강조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것은 그의 사상에서 종말론의 미래적 차원이 약화된 것을 나타내는 것일까?

현세에 이 땅에서 모든 질병 치유를 당연한 하나님의 뜻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선포하고, 모든 사람의 치유를 기대하는 것은 종말론적으로 무리일 수 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으며 구원의 은혜를 주셨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이미 칭의와 성화의 은혜를 받았다. 영적으로, 혹은 원리적으로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아직도 죄를 짓는다. 물론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차원에 있고 삶의 모습도 달라졌지만, 그 어느 누구도 완전한 사람은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날마다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화되어 완전함에 도달하는 것은 종말론적인 미래로 남겨져 있다. 물론 우리는 이 세상에서 상당한 성화의 진보에 도달할 수 있지만, 완전히 그리스도를 닮은 자가 되는 것은 종말론적으로 성취될 목표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요일3:2) 즉, 이 땅에서 죄 용서와 성화를 경험하는 것은 부분적인 것이요, 하나의 진보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3:12)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 질병을 고쳐 주시는 것도 부분적이고 잠정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어떤 치유 사역자도 자기에게 오는 모든 환자를 치유하는 사람은 없다. 또 치유를 받은 사람도 반드시 수명이 다하면 죽는다(죽을 때는 사고로 사망하는 경우가 아니면 대개 어떤 질병으로 사망한다.) 아직 아무도 죽지 않을 만큼 완전히 치유 받지 못한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이 땅에 임하였다. 그러나 그 하나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 나라의 이 세상적 실현은 아직 잠정적이고 부분적이다. 따라서 그 나라가 가져오는 치유의 은혜도 부분적이고 잠정적이다. 그러나 실현된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가 당연히 가져온다고 하는 치유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이런 부분성과 잠정성을 간과하게 되고, 자신이나 자신에게 치유를 기대하고 오는 사람들에게 지나친 기대를 가지게 할 수 있고, 그 지나친 기대가 지나친 실망으로 이어지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손 장로 자신도 구원과 성화에 있어서 이미 이루어진 법적인 것과 그것이 나에게 이루어지는 경험의 미완성적이고 점진적 성격에 대하여 이야기한다.47) 그러나 그는 이것을 치유 사역에는 적용하지 못하는 것 같다.48)

그러나 손 장로가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측면만을 강조하고, 미래적 차원을 아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도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초림과 더불어 이미(already) 우리에게 임했지만, 귀신의 세력이 온전히 척결되고 사망과 애통과 곡과 아픈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지금이 아니라 (not yet)’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인정한다. 예수님과 초림과 재림 사이의 과도기는 표적(semeion)을 통해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견본을 이 땅에서 보여주는 때라고 한다. 그리고 왕의 기도를 통해 일시적으로 치유를 받더라도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게 되며, 한시적으로 생명을 연장 받은 것뿐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므로 표적지상주의, 기적지상주의에 함몰되어서는 안 되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대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49) 이러한 종말론적 인식은 매우 올바르고 타당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이미”와 “아직 아니”의 종말론적 긴장을 치유 받는 사람도 결국 죽음에 이른다는 점에서는 적용하고 있지만, 이 땅에서 모든 환자들이 치유 받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점에 적용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또한 그는 하나님 나라를 너무 개인의 치유적 관점에서 보는 것 같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임했고,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통치는 그 무엇보다도 병자들의 치유로 드러난다고 보는 것 같다. 하나님 나라에는 질병으로 고통하는 자들이 없기 때문이다. 병자들의 치유와 귀신을 추방하는 일 등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의 표징으로 여겨지는 것은 성서적으로도 근거가 있다(마 12:28). 하나님 나라가 장소적인 개념보다는 하나님의 통치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은 신학계에 널리 알려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단지 질병 치유에 한정하여 좁게 이해해야 할까?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온전히 실현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개인의 영혼 구원과 질병 치유 이상의 것이다. 나라라는 것은 한 개인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백성들의 공동체와 사회로 구성된다. 그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라면 그 나라는 당연히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나라가 되어야 마땅하다. 그 나라에서 사람들이 건강한 상태로 사는 것은 히브리적 샬롬의 의미에 포함될 수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질병의 치유와 평화(샬롬)가 연관되는 예들을 볼 수 있다. (시83:3, 막5:34, 눅8:48)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거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정의와 평화가 온전히 실현되는 국면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것이다. 예수님이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 61:1-2을 인용하신 말씀을 보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4:18-19)

여기서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고,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한다는 말씀은 은사주의자들에게는 귀신에게 잡힌 자를 자유케 하고, 시각 장애인을 치유하며, 마귀에게 눌린 자를 자유케 한다는 의미로 보인다. 그러나 본래 이사야 61장의 비전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억눌린 하나님의 백성을 자유케 하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다시 보게 하는 사회, 정치적인 비전과 관계되어 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유대인 포로들의 귀환으로 성취되었지만, 그 말씀의 완전한 성취는 메시아의 강림과 함께 종말론적 비전으로 대망되었다. 물론 이 말씀을 인용하신 예수님이 군사적으로나 세속 정치적인 방법으로 이를 실현하시려 하신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비전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의 해, 곧 희년을 지향하고 있고, 레위기 25장에서 희년은 종교적일 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적 차원을 포함한다. 그것을 이루시는 예수님의 방법은 폭력 혁명이나 군사적 투쟁이 아니라, 십자가 희생과 사랑과 성령의 능력이었지만, 그것이 사회 공동체적인 차원을 가지는 것임은 분명하다. 이는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신 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가진 것을 팔아 서로 나누고, 유무상통하며 하나의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었음을 통해 확증된다 (행2:43-47). 더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질병이 단순히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치열한 경쟁 사회와 구조적 부조리에서 오는 스트레스, 인류 사회가 창조 세계를 파괴하고 오염시킨 데서 비롯되고 있음을 부정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렇다면 치유를 이야기하더라도 사회 공동체적 치유를 함께 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흥미롭게도 손 장로도 그의 사역의 사회적 영향력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특별한 예는 도서출판 규장의 여진구 대표의 사례라든지 평양과기대의 정진호 교수, 김우현 감독 등이다. 그들이 자신들이 받은 은사로 직장과 사회에서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50) 그러나 왜 개인적으로 열심히 교회 다니고, 성경공부도 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는 지도자들이 많은 우리 사회는 아직도 부패하고, 기독교는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는가? 열심히 교회 다니며, 방언을 하고, 신유 은사로 병을 고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소위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는 탈세와 가짜 영수증과 이중장부와 공금 횡령과 뇌물 수수와 주가조작과 분식회계 같은 일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다른 과제일 것이며, 사회에서 소외된 자, 약자로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이들을 품고, 그들의 편이 되어 주는 것, 그리하여 보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것도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4. 그의 치유 사역은 소위 “왕의 기도”를 그 주요 방법으로 한다.
“왕의 기도”는 처음에는 (적어도 『고맙습니다 성령님』이 출판되던 2007년경 까지는) “선포 기도”라고 불렸던 것이다.51)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누리는 권세로서 질병이나 질병을 가져오는 악령에 대하여 명령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 자신이 질병이 나으라고 명령하시고, 귀신에게 나가라고 명령하신 것과 같다. (눅 5:13 등) 또한 그것은 사도들이 예수님처럼 질병과 귀신에게 선포하고 명령한 것과도 같다. (행 3:6, 16:18 등)

그런데 손 장로는 이 선포를 이제 ‘왕의 기도’라는 이름으로 강조하여 시행한다. 그는 이 기도의 원리, 왕의 기도를 할 수 있는 자격 요건, 구체적인 방법, 예문까지도 『왕의 기도』라는 책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기도에는 세 종류 즉,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기도가 있는데 ‘왕의 기도’는 바로 이 세 번째 기도라고 한다.52) ‘왕의 기도’는 “왕이신 예수님처럼 문제를 향해 꾸짖고 명령하는 기도”이다.53) 왕의 기도는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만이 할 수 있는데, 나를 포기하고 나의 자아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서 죽어 변화된 삶에 들어선 하나님의 자녀만이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한다.54) 물론 이 기도에 응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뜻대로 구해야 하며,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 하에서 기도해야 하고, 시민권을 하늘에 가진 하나님의 전권대사인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도해야 한다고 한다.55) 이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이며 먼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다른 이들의 죄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정결케 되고 성령세례를 받아야 할 수 있는 기도라고 한다.56) 왕의 기도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미 왔음을 선포하는 기도이다.57)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손 장로가 말하는 왕의 기도는 다음과 같은 기도이다.

왕의 기도는 성령님의 임재 가운데 주의 말씀을 선포하는 기도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만이 할 수 있는 기도이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누리는 기도이다. 이 땅에서 왕 노릇하는 하나님 자녀들만이 할 수 있는 기도이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도이다. 십자가의 피 흘림으로 인하여 모든 죄를 사하신 법적 근거와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권능으로 선포하는 기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와 능력으로 선포하는 기도이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말씀을 이 땅에 성취하는 기도이다. 환경에 반응하는 기도가 아닌 영적으로 응답하는 기도이다. 담대히 요구하고, 명령하고, 꾸짖고, 결박하는 기도이다. 이 땅에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는 기도이다.58)

손 장로가 말하는 이러한 ‘왕의 기도’는 사실 기도라기보다는 선포이다. 손 장로 자신도 이것에 대하여 “선포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되는 대상을 보고 대화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59) 그러나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면 왜 그것이 기도라고 불려져야 할까?60) 그것은 선포의 기도가 아니라 그냥 선포이다. 그것은 “왕의 기도”라기 보다는 “자녀의 기도,” 혹은 “왕의 선포” 아니, 차라리 “자녀의 선포”이다. 그가 왕의 기도를 설명하면서 하는 대부분의 내용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와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졌으므로 그것을 믿음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손 장로가 말하는 “왕의 기도” 즉, 선포는 질병이나 질병을 가져오는 악령이나 저주에 대하여 하나님 자녀의 권세로 명령하는 것이다. 성서적으로도 예수님뿐만 아니라 사도들도 그러한 선포를 사용한 예들이 있다. 그러한 선포는 사도들에게만 국한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사도가 아닌 이가 선포를 사용한 경우도 있다. 아나니아는 사도가 아니었지만 사울을 만나 위하여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였다(행 9:17).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그 사람의 질병이 낫는 것이 그 시점에 있어서 그 환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인가를 알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손 장로로서는 모든 질병을 치유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한다. 그가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예수님이 자신에게 찾아온 모든 병자들을 다 고쳐 주셨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 속에는 질병 치유의 은혜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했는데 하나님 나라에는 질병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손 장로로서는 주저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없다. 이것을 믿고 믿음으로 선포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처음에 혹은 간혹 실패를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때로는 선포한 후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 효과가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을 고려하면서···.61)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선포해도 결국은 낫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점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방법을 사용한 과거의 사도들도 손 장로 같은 교리적 확신으로 선포한 것일까, 아니면 그 시간에 임한 하나님의 특별한 영감과 은사에 의해서 선포한 것일까?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를 보면, 그 사람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것이 그날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오랜 세월 그는 거기서 구걸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도 여러 번 거기를 지나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 사람을 치유한 것은 여러 날을 무심히 지나다니다가 바로 그 날에 행한 것이다.

또한 사도행전 16장에서 사도 바울도 여러 날 동안 자신을 따라다니며 소리지르는 귀신 들린 여인에게서 귀신을 즉시 쫓아내지 않고, 몇 일 후에야 쫓아내었다. 그러나 손 장로는 하나님이 모든 병자를 지금 치유하시기 원하신다고 믿고, 담대하게 선포하라고 한다. 심지어 그는 선포를 통해서 역사가 일어나고 안 일어나는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고 말한다: “기도의 실패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께 있다는 쯧쯔파(chutzpah) 믿음을 가져라.”62) 그런데 이렇게 되면, 실제로 그가 치유를 선포(왕의 기도)해도 낫지 않은 모든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치유를 선포했는데, 실제로는 낫지 않는 많은 사람이 현존하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이름의 신뢰성을 현저히 떨어뜨릴 우려가 있다. 이것은 또한 치유를 경험하지 못하는 많은 이들이 낫지 않는 이유를 각 사람이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는 그의 생각과63) 모순을 일으키기도 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은 성서적으로 올바른 가르침이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들”로 부름을 받았고 (벧전2:9), 우리는 고난을 참아 주와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 (딤후2:12), 그리스도의 은혜로 땅에서 왕 노릇할 것이요 (계5:10, 20:4-6) 또한 세세토록 왕 노릇할 것이다 (계 22:5). 그러나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왕권은 군사력과 물리력으로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고 섬기는 왕이다. 주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고 하셨다. (마20:28)

물론 주님께서는 마귀나 귀신들에 대하여는 섬김과 낮춤의 자세로 상대하지 않고, 권세 있는 선포로 상대하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왕의 기도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자칫 다른 동료 인간들에게도 왕권을 가진 자로 나서게 되고, 섬기는 왕의 모습을 간과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 손 장로 자신에게서 그런 모습이 보이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과거에 박태선이 치유 사역을 하다가 교만에 빠져서 자신을 신격화하는 이단에 빠진 것과 같은 전례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가 필요하다.

그가 소위 ‘왕의 기도’를 하는 방식은 매우 생소하다. 그는 집회에서 병자들의 치유를 위해 기도한 후, 그야말로 선포를 감행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질병은 떠나갈지어다, 치유될지어다!” 그리고 그는 집회 중에 치유 받은 사람들은 앞으로 나오라고 하거나 손을 들어 보라고 한다. 그리고 다시 기도한다. 그 기도 방식은 더 생소하다. 그는 그 사람을 향해 손을 내밀거나 혹은 안수를 하면서 기도한다. “성령님! 더, 더, 더, 더…. touch!” 그리고 그 사람들 중에 상당수는 거기서 쓰러진다. “성령님! 더, 더, 더, 더”는 아마도 성령님이 더욱 강하게 그에게 임하여 그를 온전케 해 달라는 기도로 보인다. 여기서 그는 다시 선포가 아니라 간구 기도로 돌아간다. 그런데 “touch!”란 무슨 뜻일까? 아마도 하나님이 그를 만져서 치유해 주시기를 바라는 내용인 것 같다. 그런데 그 한 마디는 영어로 되어 있다. 그 한 단어는 선포요 명령인가, 아니면 간구인가? 이것은 모호하다. 영어에서 기도문의 동사 형태는 명령형과 같아서 이것을 하나의 간구로 이해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는 분위기는 자칫 명령조처럼 들리게 한다. 이런 식의 기도는 마치 손 장로가 성령님을 마음대로 명령하고 주장할 수 있는 존재처럼 보이게 만들 수도 있다. 손 장로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런 태도는 사람들에게 잘못된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다.

5. 그는 위험한 직통 계시를 주장하는가?
그는 치유 사역에서 ‘지식의 말씀’의 은사(고전12:8)라고 하는 것을 활용한다. 이것은 환자의 상태에 관하여 초자연적으로 알려주시는 지식이라고 한다. 이는 미래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환자의 과거나 현재의 상태를 알려주는 말씀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사람의 모든 사정을 다 들여다보는 투시는 아니라고 한다.64) 그 외에도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 한다.

이러한 것들은 매우 주관적이며, 위험한 직통 계시를 주장하는 것인가? 어떤 의미에서 그것이 매우 주관적이라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순간에 오직 그만이 그런 하나님의 음성이나 지식의 말씀을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의 치유 집회에서 그가 말하는 것에 상응하는 사건들이 종종 일어난다는 것이다. 가령 그의 집회에서 “오늘 하나님이 오른쪽 귀가 들리지 않는 자매님을 고치십니다. 이쪽 오른쪽 좌석 어딘가에 있는 것 같은데요 앞으로 나오세요”라고 말하는데, 어떤 여인이 손을 들고 앞으로 나온다. 물론 항상 그가 들었다는 하나님의 음성 혹은 지식의 말씀대로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 같지는 않다. 그가 집회 중에 오늘 하나님이 어떤 질병으로 고통하는 사람을 고치신다고 선포하고, 앞으로 나오라고 해도 나오지 않는 경우들도 종종 있다. 그의 집회 실황 DVD를 보면, 휠체어를 타고 와서 앞 자리에 앉은 이들에게 모두 일어서라고 명령하였는데, 어떤 이는 벌떡 일어나 걸어다니며 감격해 하지만, 어떤 이는 일어서기는 했지만 도저히 걸을 수 없어 힘들게 서 있다. 다른 이는 아파서 일어날 수 없다고 하는데도 손 장로가 강요하다시피 일어나 걸으라고 하자, 일어나서 억지로 걷기는 하지만, 감격스러운 얼굴이 아니라, 여전히 고통스러운 얼굴이다.65)

이런 지식의 말씀이 그냥 마구잡이식으로 대충 병명들을 나열하는 것은 아닌가? 다수가 환자인 집회 참석자들 중에서 몇 명 정도는 해당될 수밖에 없는 병명을 불러 대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그가 그렇게 함부로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의 저서에 나오는 체험담은 그렇지 않은 경우들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기도 받으러 나오는데 심중에 “저 사람 폐에 문제가 있다”는 음성이 들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에게 폐가 아프냐고 물어보니 두통을 치료 받으러 나온 것이지 폐는 아프지 않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그 사람이 손 장로의 말이 마음에 걸려 검진을 해 보니 과연 폐가 크게 병들어 있음을 확인하였다는 것이다.66)

어찌보면 이러한 일들은 성경 외에 직통 계시를 주장하는 위험한 일같이 보인다.67) 그러나 필자는 이것이 성경 외적인 계시의 전달은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가 받는 ‘지식의 말씀’의 은사는 치유 사역의 현장에서 어떻게 기도할지, 하나님이 오늘 어떤 환자를 고치실지에 관한 인도하심에 관한 것들이지 무슨 신학적이거나 교리적인 내용에 관한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그것은 계시라고 할 수 없다. 신학적인 의미에서 계시라는 것은 하나님이 너무나도 초월적이고 무한하시고 신비하신 분이라서 피조물이요 죄인인 우리 스스로는 알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 수준에 맞추어 드러내 보이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특별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시는가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손 장로가 이야기하는 ‘지식의 말씀’의 은사는 성경이 말하지 않는 다른 신에 대하여 계시하거나,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길이 아닌 다른 구원의 길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치유 사역을 위해서 하나님이 필요한 것을 알려주시는 인도하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음성들이 과연 정말 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인가? 이에 관하여 손 장로 자신도 영적 분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음성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올 수도 있지만, 사탄의 영이나, 사람의 영으로부터도 올 수 있기 때문이다.68) 또한 손 장로는 성경 말씀에 위배되는 음성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은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무시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69)

“성령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한 것이 성경말씀에서 벗어난다면, 그것은 절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닙니다.”70) 그러므로 그가 1992년 휴거 소동을 벌인 다미선교회 같은 길로 빠질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마음 속에 성령님이 주시는 생각이라든지, 자신의 몸의 어느 구석이 갑자기 아프다든지 하는 현상을 통해서 하나님이 오늘 어떤 병자를 치유하시는지 알게 된다고 한다. 때로는 다른 사람이나 주변 환경으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도 한다고 한다.71) 그러나 그가 치유기도를 하면서 말하는 지식의 말씀의 은사가 정말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보다 신중한 분별과 주의가 필요할 것이다.

손 장로가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은 요즈음 신사도 운동에서 주장하는 성령의 임재로 인한 예언과는 성격이 다르다. 신사도 운동은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강조하고, 그 임재를 체험한 사람은 사도적인 권위를 가지며, 그가 하는 예언은 사도적 권위를 가진 것으로 인정하고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손 장로는 자신이나 자신의 치유사역 스태프들의 사도적 권위를 주장하지도 않고, 사도적 권위로 무슨 예언을 하지도 않는다. 그는 다만 지식의 말씀의 은사의 도움으로 치유사역을 할 뿐이다. 그가 신사도 운동 계열의 사람들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그 자신이 그 운동을 추종하거나 전파하는 것 같지는 않다.

또한 이런 것들을 사용함으로써 손 장로 자신이 자신을 신격화하는 길로 가고 있다는 조짐도 (적어도 아직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철저히 자신이 치유자가 아니요, 하나님이 치유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고, 자신은 “빈 깡통”이요72), 치유와 기름부으심의 “통로”라고 누누이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73) 그러나 그러한 대규모 치유 집회를 정기적으로 인도하고, 전국으로 또한 외국으로도 집회를 다니면서 열광적인 집회의 분위기와 치유 받았다는 사람들의 간증을 접하고, 자신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는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교만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치유 받은 이들이 자신에게 감사하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어떤 분들은 나에게 정말 감사하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큰일 날 소리입니다. 나는 그런 분들에게 내가 아니라 꼭 예수님께 감사하도록 시킵니다.”74) 만일 손 장로가 자신을 절대화하거나 교만에 빠지면 그것은 그 자신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요, 그는 이단이 될 것이며 많은 이들이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는 이 점을 깊이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 자신도 이 교만의 문제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75)

6. 그를 통해 치유되었다고 하는 사건들은 모두 사실인가?
그의 치유집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기도를 받고 치유되었다고 간증한다. 특히 그가 인도하는 매주 월요치유집회에서는 그의 기도에 이어 많은 사람들이 치유 받았음을 간증한다. 즉석에서 간증하는 사람들도 있고, 차후에 인터넷에 간증담을 올리기도 한다. 그런 간증의 내용들은 모두 진실일까? 그 치유 사건들의 사실성을 과학적으로 확증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려면, 우선 치유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과연 어떤 질병에 걸렸었는지 분명한 사전 진단을 객관적으로 받아야 하고, 그것이 공개되어야 하는데, 그러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또한 동일한 사람의 확증된 질병에 대하여 기도 후에 신뢰할만한 의료 기관에 의하여 분명히 치유가 되었는지 다시 검증이 필요하며, 이 또한 공개되어야 한다. 이 또한 현실적으로 어렵다. 또한 설사 어떤 사람이 질병이 걸렸었는데, 그가 깨끗이 나았다는 것이 확증될지라도, 과연 그것이 그의 기도의 효험인지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그렇게 하려면 동일한 질병에 걸린 사람들의 표본 집단을 구성하고 그의 기도를 받은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밝혀야 한다. 그러나 이는 더더욱 곤란한 일이다. 또한 어떤 사람들의 질병은 의학적으로 진단이 불가능하지만, 환자 자신은 고통을 겪는 질병들도 있다. 그런 사람이 기도 후에 통증이 치유되었다고 하면, 이는 더더욱 입증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의 치유집회에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찾아오고, 찾아 와서 기도를 받은 사람들의 상당수가 치유되었다고 스스로 나와서 간증하는 것을 보면,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 집회를 통해 치유를 받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 같다. 사람들이 전혀 치유의 효험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왜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해가면서 그 집회에 참석하겠는가? 참석한 환자들의 100%는 아닐지라도 상당수가 치유의 경험을 한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다른 환자들도 찾아오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손 장로가 모든 질병을 치유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그래서 모든 질병이 떠나라고 “왕의 기도”를 하며, 모든 질병이 다 고쳐질 듯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실제로는 치유를 받지 못한 채 돌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더 큰 실망감과 죄책감을 안겨 줄 수 있으며, 그런 현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그의 치유 사역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7. 지나친 일반화의 문제
그는 모든 것을 치유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그가 강조하는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도 치유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효과를 발휘할 때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들의 질병을 치유하는 것은 분명히 그 나름대로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은사들 중에 하나이다. (고전12:9, 28) 그러한 은사를 가지고 환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많은 환자들을 치유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런 은사가 모든 환자들을 다 치유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지나친 일반화일 것이다.76)

예수님은 치유를 요청하는 모든 사람들을 고치시고, 많은 치유를 행하셨지만, 치유를 그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생각하신 것 같지는 않다. 예수님은 아마도 치유를 바라며 그를 찾는 수많은 사람들을 뒤로 하고 다른 마을로 가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막1:38) 또한 그는 여러 번 치유를 받는 사람이 치유를 받은 사실을 함구하도록 명령하셨다. (막1:44, 막3:10-12, 막8:26, 마8:4, 마9:30, 마12:15-16) 치유 자체가 그렇게도 중요한 것이요, 모든 질병을 고치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었다면 그리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또한 베데스다 연못가에 수많은 환자들이 누워 있었지만, 주님은 오직 한 사람, 그 38년된 병자 한 사람만 고치시고는 자리를 떠나셨다. (요5:1-9) 이렇게 볼 때에 많은 경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치유의 은혜를 (자연적 혹은 초자연적 방편으로) 주시는 것도 사실이지만, 때로는 질병의 고통을 겪어내야만 하는 경우도 있고, 결국은 죽음으로 마감해야할 경우도 있다. 우리는 질병을 치유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을 모두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치유의 은혜는 소중하고 감사한 것이지만 치유가 모든 것은 아닐 것이다.

지나친 일반화의 사례는 그가 주장하는 소위 “가계에 흐르는 저주”에 관한 내용에도 나타난다. 그는 기도해도 치유되지 않는 경우에 그 이유를 여러 가지 저주에서 찾고 있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 장소나 물건에 연관된 저주, 잘못된 맹세나 말 때문에 들어오는 저주 등.77) 물론 성경에는 “…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출20:5-6)”라는 말씀이 있다.

그러나 반대의 말씀도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아들이 어찌 아버지의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는도다 아들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내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였으면 그는 반드시 살려니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겔18:19-20)”는 말씀도 있다. 그러므로 가계에 흐르는 저주라는 것을 이론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경우에 따라서 어떤 저주에 매인 문제로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며, 그런 사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것을 깨뜨리고 풀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를 너무 일반화해서 마치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에도 항상 이 저주 문제에 신경을 쓰고 일일이 그렇게 대응해야 된다고 볼 필요는 없다고 본다.

8. “왕의 기도” 신학은 자칫 십자가 신학, 고난의 신학을 간과하게 될 수 있다.
손 장로의 치유 사역은 그의 하나님 나라 사상과 믿는 자들이 하나님 자녀의 왕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치유 사역은 하나님께 환자들의 치유를 구하는 간구 기도와 더불어, 아니 그보다 더욱, 치유의 선포 (소위 ‘왕의 기도’)를 중요한 방편으로 한다. 그런데 이러한 선포와 하나님 나라 사상은 자칫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질병을 포함한) 고난도 감수해야 하는 우리 몫의 십자가를 도외시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죄와 악을 이기고, 마귀도 이기고 승리하셨지만, 그것은 자기를 내어 주고, 십자가에 달려 죽는 희생을 통해서 성취된 것이다. 그것은 패배 같이 보이지만, 영적인 의미에서 진정한 승리를 이루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능력해 보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 되었다. 하나님의 무능력이 사람의 능력보다 더 능력이 있다. (고전1:18, 24-25) 그리스도는 자신을 체포하고 감금하고 채찍질하는 사람들을 제압할만한 권능이 있었지만,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조롱과 모욕 속에 십자가의 길을 가셨으며, 결국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셨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겐 영원한 구원이 길이 되었다. 우리는 그 은혜로 인하여 죄 용서를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성화의 삶의 길을 걸어가며, 전도와 봉사의 삶을 산다. 그 길에서 우리도 고난과 역경과 질병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런 고난 속에서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는 놀라운 도움과 치유를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기도해도 고난과 질병이 떠나지 않을 때도 있다. 사도 바울도 그 자신의 “육체의 가시” 때문에 세 번이나 그것이 떠나기를 간구했지만 떠나지 않았다. 그는 손 장로처럼 소위 ‘왕의 기도’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내 육체의 가시야 떠나갈찌어다”)를 사용한 것 같지 않다.

역사상 수 많은 순교자들이 있어 왔다. 순교자들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체포, 감금, 고난, 혹은 그로 인한 질병을 당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풀어주시거나 고쳐주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묵묵히 믿음의 길을 갔고, 그렇게 승리하였다.

박영돈 교수도 역시 치유의 문제를 영광의 신학에 대조되는 십자가의 신학의 관점에서 본다. 그는 구원에는 영혼 구원 뿐 아니라 육체의 치유도 포함되어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누구든지 믿으면 예외 없이 죄 사함을 받지만, 질병마저 100퍼센트 치유된다는 보장은 없다고 본다. 물론 병이 낫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육체의 완전한 치유는 종말에 가서야 이루어진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어떤 질병이 지금 당장 나을 수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78) 때때로 하나님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질병과 고통이라는 십자가를 통해서 더 많은 영적인 질병, 교만과 방종을 치유하시고 영적 성숙의 밑거름인 겸손과 인내를 배양하신다고 본다.79) 황성철 교수도 손기철 장로의 신학이 십자가의 신학을 결여한 성공의 신학이 아닌가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다.80)

맺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손기철 장로의 치유 사역과 신학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았다. 그는 오순절 운동 계열(신오순절 운동과 제3의 물결 등을 포함하여)의 영향을 받아 성령론 중심적이고 은사주의적인 신학을 가지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그는 특히 성령론에 관한 권능주의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81) 우리는 성령의 권능과 은사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복음 사역을 위하여 사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권능과 은사에 치우쳐서 성령에 대한 균형 잡히고 통전적인 이해를 벗어난다면 문제가 있다. 또한 우리는 그가 치유 사역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특히 일종의 실현된 종말론의 입장에서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강조함도 살펴보았다.

그는 그의 하나님 나라 신학에 근거하여 모든 병자의 치유가 하나님의 뜻임을 주장하는데, 지나치게 실현된 종말론에 치우치면 치유의 종말론적인 차원을 오해하게 된다. 그는 특히 ‘왕의 기도’라는 특이한 방법으로 치유사역을 하고 있다. 그러나 손 장로가 말하는 것처럼 모든 병자를 고치는 것이 성서적으로 올바른 주장인지에 대하여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왕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치유 받지 못한 채, 그의 집회를 떠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들은 모두 믿음이 없는 자들이라고 치부되어야 할까? 또한 ‘왕의 기도’라는 용어라든지 그 기도의 방법에도 문제가 있다. 또한 그의 하나님 나라 신학이 지나치게 치유 중심적이고 개인주의적이라는 점도 지적할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또한 그가 말하는 하나님 음성을 듣는 일이나 지식의 말씀의 은사에 있어서도 분별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그의 주장에서 그가 경험한 것들을 중심으로 지나치게 일반화하려는 경향도 보인다. 그러나 필자로서는 그에게서 교리적으로 이단이라고 지적할 수 있는 점을 발견하지는 못하였다.

사실, 그는 그동안 우리가 주변에서 보아 왔던 부흥사들이나 치유 사역자들에 비하면 상당히 긍정적인 면들을 가지고 있다. 그는 어떤 은사 사역자들이 말을 함부로 하고, 남의 비밀과 죄를 들추어내며, 지나친 헌금을 강요하고, 마치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행동함으로써 성령 사역에 대한 나쁜 인상을 주어 참된 성령 사역을 방해하는 것에 대하여 우려한다.82) 그는 기도원 같은 곳에서 치유를 댓가로 돈을 강요하거나 이상한 시술을 하는 것에 대하여도 비판적이다.83)

또한 그는 성경 말씀과 설교를 매우 중요시한다. 그는 “우리 모두가 성경을 깊이 알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성경 연구를 강조한다. 또한 동시에 그 성경 말씀에 성령의 조명이 함께하셔야만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알 수 있다고 한다.84) 그는 말씀과 성령 사역의 조화를 주장하면서, 다른 성령 사역자들의 집회에서 설교의 대부분을 자기 경험담이자 자랑으로 채우다가 실패하는 일에 대하여 우려한다.85) 실제로 그의 치유 집회에서 그는 상당 시간을 수많은 성경 본문들을 인용하는 설교에 할애한다. 그는 “말씀과 성령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둘은 하나입니다. 모든 성령의 역사는 말씀 안에서 이루어집니다”라고 말한다. 또한 “말씀은 그 말씀에 따르는 능력이 임해야 진정한 말씀”이라고 주장하며 치유 사역을 한다.86) “말씀 없이는 성령님이 하실 일이 없다. 성령님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기초하여 역사하신다”고 말한다.87) 그렇다고 그의 저서나 설교가 항상 치유에 대한 것만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그의 저서와 설교는 믿음, 회개, 자존자적 삶으로부터 의존자적 삶으로의 전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 자기포기, 내적 치유, 성령의 열매, 성화의 삶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88)

그는 은사나 성령 현현 현상을 인위적으로 조작함에 대하여 반대한다. 그는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방언을 유도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다. 예를 들어, ‘할렐루야’나 ‘랄랄라’를 계속함으로서 방언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에 비판한다.89) 방언은 성령의 주권에 달려있는 것이지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90) 그는 또한 방언을 하더라도 공동체의 질서를 위해 방언을 절제해야 한다고 권면하기도 한다.91) 그는 방언을 긍정적으로 보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이 방언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92) 또한 그는 쓰러지는 현상(성령 안에서 안식)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만, 그런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거나 어떤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는 요인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또한 성령 안에서 안식하는 현상을 갖기 위해 어떤 인위적인 방법도 시도하지 말라고 한다.93)

그는 성령 체험이 여러 가지 다양한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체험 후에 하나님과의 교제를 소홀히 하거나, 경험의 의미를 알지 못하거나, 경험이 있다는 사실로 자위하거나, 삶이 변화되지 않은 채 집회나 부흥회를 쫓아다니거나, 그런 체험을 영적인 파워로 생각하여 부흥회나 집회에서 스스로 넘어짐으로서 자신의 신앙을 나타내 보이려는 것 등을 모두 경계한다. 그런 일에 자기 최면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 체험이 무엇이었는지는 결국 그들의 열매로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94)
그는 성령사역의 적극적인 수용으로 말미암아 부작용이 크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에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성령 집회 후 성도 간에 이상한 계층이 생기거나, 성숙하지 못하거나 잘못된 은사 사용으로 인해 혼란이 초래되거나, 교회가 이단 시비에 휘말리거나, 분열되거나 하는 일들이다. 그는 이런 일들이 사람들의 이해 부족에서 온다고 보고 그런 오해를 불식시키려고 노력한다.95)

그는 의술이나 약의 사용을 부정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는 의학 각 분과의 전문의들과 연합해서 치유 사역을 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는 의사와 치유 사역자가 서로 반대자가 아니라, 서로 연합하는 거룩한 동역자라고 한다. 하나님은 신유 사역자도 쓰시지만 의사를 통해서도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크리스천 의사에게도 기름부으심이 있으면 더 좋지 않겠느냐고 한다. 신유 사역자와 의사가 함께 의논하면서 합심하여 기도했으면 좋겠다고도 한다. 또한 치유가 일어났을 때, 정말 병이 나았는지 의사가 바로 확인해 줄 것을 원하기도 한다.96) 그는 기도 받고 나서 반드시 약을 끊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약을 끊을지 말지는 의사가 결정할 일이지 신유 사역자가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한다. 하나님은 안수 기도를 통해서도 역사하시지만 약을 통해서도 역사하신다는 것이다.97) 이런 모습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아 왔던 치유 사역을 하는 부흥사들이나 기도원의 집회들 보다는 훨씬 나은 모습이라고 판단된다.

이러한 면모들을 살펴 볼 때, 필자는 전통적인 교회와 신학자들이 그를 정죄할 것이 아니라, 전문적인 신학 교육을 받지 못한 그에게 적절한 권면과 충고를 제공하여, 보다 균형 잡힌 치유사역을 하도록 돕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온누리교회에서 나가서 아무의 감독과 지도도 받지 않고 독립적인 사역을 하는 것은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은사로 병자를 고치심을 믿고 받아들이며, 그러한 일이 교회 안에 많이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손 장로가 보다 균형 잡힌 신학과 방법으로 건전한 치유 사역을 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  미주 ——–
1) 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초판 98쇄 (서울: 규장, 2012)
2) 월요치유집회가 온누리교회에서 독립한 내력에 관하여는 『기대합니다 성령님』초판11쇄 (서울: 규장, 2011), 16쪽 이하.
3) 그는 자신의 책이 “오순절 계통의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 성도가 썼음직한 내용들로 편향되어 있다고 자인하지만,” 자기가 “성경말씀 대신에 능력과 은사만을 추구하는 성도라고 오해한다면 그것은 본래 저자의 의도에서 벗어난 성급한 판단”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자신의 책이 “말씀중심적 복음주의 신앙의 기초 위에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를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주장한다. 손기철,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 개정판 (서울: 두란노, 2011), 23-24. 책에 기록된 출판 정보는 초판 49쇄라고 쓰고 있지만, 책머리에 있는 “수정본을 내며”라는 글은 이 판본이 2009년에 개정한 판임을 보여준다.
4) 손기철,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 개정판, 181.
5) 위의 책, 182-183.
6) 위의 책, 184.
7) 위의 책, 327-328.
8) 위의 책, 185.
9) 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197.

10) 위의 책, 201
11) 손기철,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 개정판, 214.
12) 위의 책, 186.
13) 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217.
14) 위의 책, 222.
15) 손기철,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 개정판, 334-335. 손기철은 기름부으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별도로 한 권의 책에 썼다. 손기철, 『기름부으심』 초판 37쇄 (서울: 규장, 2011).
16) 손기철,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 개정판, 358이하; 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98, 215.
17) 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99이하.
18) 손기철,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 개정판, 361.
19) 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215.

20) 배본철 교수는 성령세례론의 여섯 가지 유형을 분석하여 제시한 바 있다. 그것은 (1) 봉사의 능력을 위한 성령세례, (2) 정결과 능력의 성령세례, (3) 그리스도의 전인적 통치로서의 성령세례, (4) 중생으로서의 성령세례와 그 이후 성령충만, (5) 방언의 표적을 중시하는 성령세례, (6) 중생으로서의 성령세례와 이후 은사적 성령충만이다. 배본철, “성령세례의 능력 구현에 대한 역사적 연구,” 제17회 기독교학술원 월례기도회 및 발표회, (2011년 12월 2일), 21-24.
21) 손기철,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 개정판, 233, 237.
22) 손기철, 『치유기도』 초판 18쇄 (서울: 규장, 2010) 23-24.
23) 손기철,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 개정판, 236.
24) 위의 책, 238.
25) 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128.
26) 위의 책, 234.
27) 위의 책, 235.
28) 손기철,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 개정판, 246.
29) 위의 책, 248-249.

30) 위의 책, 249.
31) 박영돈,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서울: IVP, 2011), 128에서 재인용.
32) 박영돈 교수는 오늘날에는 치유가 많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를 교회의 발전 단계상 초기에는 표적과 기사와 치유가 많이 일어나지만, 교회가 어느 정도 성장하여 자리를 잡으면 그런 일들이 줄어든다는 역사적 현상과, 교회가 처음 열심과 생명력을 잃고 제도적으로 경직된 이유 등을 거론한다. 위의 책, 113이하.
33) 손기철,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 개정판, 17.
34) 위의 책, 19.
35) 위의 책, 89.
36) 위의 책, 89.
37) 손기철,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 개정판, 83; 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127.
38) 손기철,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 개정판, 83.
39) 위의 책, 105이하.

40) 위의 책, 108.
41) 위의 책, 117.
42) 위의 책, 117.
43) 위의 책, 87, 304 이하.
44) 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126.
45) 손기철,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 개정판, 87.
46) 오순절 교파들은 흔히 네 가지 혹은 다섯 가지 핵심 교리를 주장한다. 다섯 가지 주제를 주장하는 전형적인 경우는 북미오순절연합 (the Pentecostal Fellowship of North America, PFNA)이 발표한 ‘진리 선언 (Statement of Truth)에 나타나는 데, 그 다섯 가지는 회심, 성화, 성령세례, 신유, 재림이다. Donald W. Dayton, Theological Roots of Pentecostalism (Peabody, Mass: Hendrickson Publishers, 1987), pp.19-20. 또한 그 근원이 직접적으로 저 아주사 거리의 부흥에 있다고 하는 사도신앙선교회 (Apostolic Faith Mission)는 칭의, 성화, 성령세례, 신유, 임박한 재림 (전천년설)이 다섯 가지를 내세운다. 한편 다른 오순절계 교파들에서는 보다 분명히 네 가지 주제 즉 회심, 성령세례, 신유, 재림을 내세운다. 미국 하나님의 성회 (Assemblies of God)의 신학자인 스탠리 홀튼 (Stanley Horton)은 구원, 신유, 성령세례, 재림의 네 가지를 말한다. 에이미 맥퍼슨 (Aimee Semple Mcpherson)이 세운 국제사중복음교회 (International Church of the Foursquare Gospel)도 역시 네 가지를 중요시한다. Raymond L. Cox ed. The Four-Square Gospel (Los Angeles: Foursquare Publications, 1969), p.9, cited by Dayton, p.21.
47) 손기철,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 개정판, 75.
48) 박영돈 교수도 치유를 종말론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박영돈,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119.
49) 손기철, 『왕의 기도』 초판 78쇄 (서울: 규장, 2011), 100-104.

50) 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224-233.
51) 위의 책, 111이하.
52) 손기철, 『왕의 기도』, 23-24.
53) 위의 책, 26.
54) 위의 책, 47.
55) 위의 책, 67.
56) 위의 책, 83-86.
57) 위의 책, 115.
58) 위의 책, 133.
59) 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114.

60) 이에 관하여 황성철 교수도 이의를 제기하였다. 황성철, “손기철 장로의 ‘왕의 기도’에 대한 개혁신학적 비평,” 총회신학부 편, 『바른 영성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적 조망』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신학부, 2011), 327이하.
61) 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116이하.
62) 손기철,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 개정판, 314. chutzpah는 Yiddish말로서 행동에 극단적인 확신을 가진 것을 묘사한다고 한다.
63) 위의 책, 238.
64) 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157.
65) “당신은 왕자인가, 거지인가?” 『왕의 기도 DVD북』 1-2편, 2008년 6월 9일 월요말씀치유집회 실황. (서울: 규장, 헤븐리 터치)
66) 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163-164.
67) 김지찬 교수는 특히 손 장로의 이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우려한다. 그가 로고스보다 레마를 중요시한다든지, 레마가 매우 주관적이라든지, 사적 계시로 성경을 훼손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든지 하는 비판은 충분히 이해할만한 비판이다. 김지찬, “손기철 장로의 신비주의 은사(치유) 집회, 어떻게 볼 것인가?” 총회신학부 편, 『바른 영성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적 조망』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신학부, 2011), 302-308.
68) 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90-91.
69) 위의 책, 88.

70) 위의 책, 91.
71) 위의 책, 92-97.
72) 손기철, 『기름부으심』, 87.
73) “우리는 은사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사람이 아니라 은사의 통로일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통로일 뿐입니다.” 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141, 190.
74) 위의 책, 151
75) 위의 책, 130.
76) 황성철 교수는 이를 환원주의의 오류라고 비판한다. 황성철, “손기철 장로의 ‘왕의 기도’에 대한 개혁신학적 비평,” 331 이하.
77) 손기철,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 개정판, 365이하.
78) 박영돈,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124이하.
79) 위의 책, 120. 박 교수는 과거 한국 교회의 부흥사로서 약 4만 명 정도를 치유했다는 박재봉 목사의 일화를 소개한다. 그는 치유 받은 사람들의 이름을 수첩에 적어 두었다가, 나중에 그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지 알아보았는데, 열 명 중 칠 팔 명은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치유 기도를 중단했다고 한다. 위의 책, 126쪽.

80) 황성철, “손기철 장로의 ‘왕의 기도’에 대한 개혁신학적 비평,” 329.
81) 필자는 성령을 이해하는 다양한 관점들을 본체론, 성례주의, 주지주의, 주의주의, 감정주의, 권능주의, 공동체론, 종말론 등으로 분석하여 장단점을 논하고, 보다 통전적인 성령 이해를 할 것을 주장한 바 있다. 현요한, 『성령, 그 다양한 얼굴』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998).
82) 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191.
83) 위의 책, 236.
84) 손기철,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 개정판, 24-25.
85) 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80.
86) 위의 책, 81.
87) 손기철,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 개정판,, 323.
88) 예를 들어, 그의 처음 저작인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 (2006)에서 그는 성령 체험과 치유에 대하여 말하기 전에 그 기초로서 이 부분을 매우 자세하게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 이 책은 전체 5부로 되어 있는데 제1부는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라는 제하에서 회개, 십자가의 도와 죄에서 해방, 율법의 완성과 새로운 삶, 하나님 나라와 법칙, 킹덤 멘털리티, 뿌리와 열매, 그리고 생수, 변화되지 않는 이유 등을 다룬다. 제2부는 “믿는 자에게는”이라는 제하에서 그리스도인의 믿음, 믿음과 영적 반응, 믿음과 행동, 믿음의 현재성, 믿음의 삶, 믿음의 기도 등에 대하여 자세히 논한다.
89) 위의 책, 362.

90) 위의 책, 358.
91) 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102.
92) 위의 책, 215.
93) 손기철,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 개정판, 205.
94) 위의 책, 209.
95) 위의 책, 220.
96) 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238.
97) 손기철,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 개정판,, 271-274; 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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